창작의 준비물— Materials for creation
창작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연필과 노트? 기발한 생각? 하고 싶은 이야기?
물론 그런 것들도 대체로 어느 정도는 맞는 것들이지만 내 경험과 생각으로 정말 필수적인 준비물은, “뭔가를 아주 좋아하는 것”이다. 뭔가를 아주 좋아하는 것. 내 학창시절과 대학교 시절에는 뭔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그게 미처 필요한 것이라고 인식되지도 않았다.
중⋅고등생이던 어린 시기에 포토샵이든, 그림 그리는 것이든 뭔가를 창작하는 방법을 학습하면 곧바로 여러가지 결과물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때는 창작에 필요한 것은 창작 도구와 기술을 익히는 것이라고 강하게 믿었다. 그러기에 연필과 노트가 필요했고, 컴퓨터가 필요했으며 디지털 창작에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닥치는대로 열심히 배웠었다.
그리고는 시간이 지나 도구와 기술을 사용하는 방법은 경험치가 조금 쌓였고, 결국 창작에는 기발한 생각이나 전달하고자 하는 뭔가가 더 필요해지게 되었다.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창작을 할 것인가가 중요해졌다. 웹사이트를 만들든 앱을 만들든 혼자만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면 의도가 필요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업무에서의 의도는 대체로 UX/UI로 커리어를 시작했기 때문에 유용하고 쓰기 편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다 그런 고민들이 문제 해결이라는 워딩으로 귀결되면서 매일을 문제 해결을 위한 디자인을 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문제 해결. 유용한 것. 그것들을 위한 디자인을 할 때에는 사실, 특별한 의도를 가지지 않아도 되었다. 디자인을 하는 행위 자체가 좋았고 또 그것으로 인정받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UX/UI로 표현되는 IT 디자인영역은 iPhone의 등장 이후 가파르게 관심을 받고 또 인정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시대 흐름의 전선에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 디자인 하는 것이 좋았다. 새로운 트렌드를 계속 찾고 작업과 업무에 적용했다.
그리고는 AI 때문인지 시대의 흐름인지 관련 일을 꽤 오래 해서 권태가 온건지 뭔가를 만들고자 하는 생각이 과거에 비해 점점 사라졌다. 뭔가를 만들 수 있는 경험과 역량, 기술은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한 시기인데 왜 뭔가를 만들려는 생각만 하고 실행되지 않을까를 생각해보면 뭔가를 아주 좋아하지 않는 상태라서 그렇다고 결론을 내렸다.
100번 들어도 질리지 않던 음악.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던 이성. 적어도 일주일은 가던 명작 영화의 여운. 어떻게든 만들어 보고 싶던 멋진 웹사이트. 너무 감각적이어서 앉은채로 몇 번 돌려봤는지도 모를 뮤직비디오. 제품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던 애플 제품들
열거한 것 중 지금 나에게 유효한 것들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예전에 비하면 컨텐츠는 엄청나게 많아지고 소비의 유통기한이 극단적으로 짧아진 것도 한 몫 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헷갈리는 점은 경험이 쌓이면서 생긴 권태인지. 시대가 변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
이제는 곧 바로 컴퓨터에 앉아서 글을 쓰거나 디자인을 하는 행위로 창작을 시작하려는 것 보다는 한 발짝 물러나서 책, 음악, 전시, 모임 등에 참여하면서 그동안 소진된 인풋을 차곡 차곡 다시 쌓는 것부터해서 다시 좋아할 무언가를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함을 늦게라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읽다만 창조적 행위를 다시 읽어봐야겠다.